인권유린의 실체, 형제복지원 사건의 전말... tvN 알쓸범잡 방송

김민진 기자 승인 2021.04.11 10:47 | 최종 수정 2021.05.04 16:15 의견 0
사진 tvN 알쓸범잡
사진 tvN 알쓸범잡

[포스트21 뉴스=김민진 기자] 지난 4월 4일. 우리 주변의 범죄 이야기를 다룬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이른바 알쓸범잡이 첫 방송을 시작했다. 한 분야의 권위자들이 모여 다양한 범죄를 살피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방송의 첫 무대는 부산이었다.

부산에서 벌어졌던 경악할 만한 범죄 이야기 중 화제가 된 것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얼마 전 이 사건을 주도한 원장의 무죄판결을 취소해달라는 검찰의 비상상고가 기각되면서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재조명된 바 있다. 이미 30년이 넘은 사건이지만, 지금도 계속 진행중인 형제복지원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시작이 된 내무부 훈련 제410호

1975년,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발표한다. 유신정권의 발족으로 좋지 않은 민심을 돌리기 위한 정책으로 거리에 넘쳐나는 부랑아를 국가에서 단속하겠다는 취지로 내무부훈령 제410호가 개설된 것이다.

이에 전국에서는 나라에서 직접 부랑아를 잡아들이는 일이 벌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일을 민간에 위탁했고, 사단법인인 형제복지원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개설된 복지원이었다.

사진 tvN 알쓸범잡

창립자인 박인근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제대한 뒤 장인이 운영하던 형제육아원을 인수하여 복지원을 만들고, 정부의 국가사업을 도맡겠다며 일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데려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부랑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복지원 안에서 마치 군대나 감옥같은 부조리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실체

형제복지원은 부산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잡아다 부랑아로 둔갑시키고 12년 동안 감금하여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고된 노동을 시켰으며, 여성의 경우에는 성폭행과 성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반항하는 이들에게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바닷가에 놀러왔다가 납치당한 서울대 학생도 있었고, 한국에 관광 온 일본인도 있었다. 총 4,300여 명의 일반인이 납치되었는데, 그중 밝혀진 희생자 수만 513명이다. 군대식 구조를 지닌 형제복지원은 삼청교육대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고 안에서 박인근의 말이 곧 법이었다.

사진 tvN 알쓸범잡
사진 tvN 알쓸범잡

식사는 간신히 생존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부랑아들에게 나오는 정부의 지원금과 노동의 대가 등은 고스란히 박인근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이 사건이 무서운 이유는 부산 공직사회 전체가 연대해 만들어진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박인근 개인의 부도덕은 당연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당시 부산 공직사회는 박인근의 만행을 방조한 것을 넘어서 협조하기까지 했다. 부랑아들 퇴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산시 공무원들은 형제복지원의 모든 부조리를 눈감아주었다.

삼엄한 감시를 뚫고 경찰서까지 내려간 원생도 있었지만, 경찰이 그를 다시 복지원으로 데려다주었다는 일화는 당시 부산의 공직사회가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6년,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주임검사가 사냥을 갔다가 현장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40여 명의 사람을 죽이기도 했던 박인근은 죄질에 비해 극히 가벼운 징역 2년에 처해졌다.

살인죄나 감금 등 강력범죄는 모두 빠지고 자잘한 경범죄만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사건이 드러났던 시기가 1987년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 등으로 정국이 워낙 혼란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거세진 민주화 운동으로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이 사건까지 이슈화 되면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 유야무야 얼른 덮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은 사건 이후에도 박인근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을 여러 매체에서 내비친 바 있다.

결국 국가의 명령으로 벌어진 인권유린의 사건이 국가에 의해 마무리된 셈이다. 이에 피해자들 중 살아남은 이들이 1인 시위와 출판 등을 통해 이 사건의 비정함을 알리려 노력했고, 결국 2018년 11월, 박인근의 무죄에 대한 검찰총장의 비상상고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비상상고를 기각해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번 대못을 박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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