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단의 거장 최예태 화백, 색채로 ‘예술의 혼’ 피우다

정민희 기자 승인 2020.03.08 07:50 | 최종 수정 2020.03.08 08:05 의견 0
최예태 화백
최예태 화백

[포스트21=정민희 기자] 우리의 예술을 담은 작품에 대해 그 위상을 알리려는 듯 그날따라 유난히 힘차게 휘날렸다. 가슴이 벅차오름은 당연한 것일 터,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의 것을 보고 한국의 미에 감탄하며

탄성을 자아낼 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긍지와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난해 7월 프랑스 마니에 시청에서 열린 ‘제31회 마니에 국제 미술페스티벌’에서의 풍광이다. 영광스럽게도 31번째 의장국으로 초빙되어 많은 외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바다 건너 타향에서 태극기가 높이 휘날렸다

제31회 프랑스 마니에 국제 미술페스티벌은 프랑스의 거장 장마리자끼 화백의 초대에 한국 화단의 거장 최예태 화백이 화답하여 성사됐다. 최예태 화백은 정영남, 강석진, 최종옥, 서승석, 안진수, 서영숙, 하수희 화가들과 함께 부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부채전’ 130여점을 전시했고 많은 외국 관객들로부터 큰 찬사와 호응을 받았다.

그는 부산충렬사 민족기록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놓기는 어렵다)으로, 무형문화재로 등재 되었으며 2019년 한국구상대제전 조직위원장 및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상임고문위원장으로 활약 중이다.

프랑스 마니에 국제 미술페스티벌, ‘부채전’ 뜨겁게 달구다

부채는 한 여름의 더위를 쫓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그림과 서예를 그려 장식용으로 사용해 왔다. 옛 진서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600년 이전부터 부채에 그림과 글씨를 써왔다는 기록이 있다.

독도여 영원하라 20P
독도여 영원하라 20P

최예태 화백은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담아낸 이번 활동은 한국의 또 다른 미를 알릴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며 “오랜 전통을 가진 국제 페스티벌에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작가들에게도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마니에 국제미술페스티벌’은 세계적인 국제 미술대회로 지금까지 2,500여명의 작가가 등록했고, 6,000여점의 작품이 출품된 곳이다. ‘장테보’와 ‘베르나르 테시에’에 의해 창안됐고 현 명예회장 ‘클로드오디스’와 초대회장 ‘장마리자끼’에 의해 세계적인 국제 미술대회로 자리매김했다.

장마리자끼 화백과 <필연적 우연>에서 만나

최예태 화백은 지난 2017년 ‘라메르 갤러리’와 서승석 미술평론가 초대 2인전 <필연적 우연>을 진행하며 장마리자끼 화백을 만났다. 두 화백 모두 색채의 연금술사로 정평이 나 있다. 고령의 나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닮아 있다.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같은 취향과 안목으로 두 사람은 금세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예술적 우정이 되었다. 최예태 화백은 “장마리자끼 화백은 레지옹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은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며 “예술적 감각은 물론이고 그의 열정과 에너지까지 언제나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했다.

화랑에서 첫 그림을 보고 가슴이 뛰다

최예태 화백은 193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군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미술에 뜻을 두고 서울로 상경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다니다가 1988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알공퀸 칼리지에서 서양화와 수채화를 수학했다.

1991년 캐나다 퀘백 대학교에서 조형미술을 전공했고 뉴욕의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미술학을 배웠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당시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도 민감했던 시기였다”며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붓은 놓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마운틴 15F
마운틴 15F

그 당시 최예태 화백은 수줍어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골목대장으로 군산의 금광동과 월명동, 그리고 구시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라경문, 라병재, 조용준과 친숙해지면서 그림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설레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형편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집안의 반대도 극심했다.

유년시절 최예태는 사랑을 따라 도피하듯 집을 떠났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막노동과 장사판에서 몸을 쓰며 일했지만 희열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을 볼 때 느꼈던 그 떨림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일탈은 그림만이 그의 길임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림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손에 붓을 든 젊은 최예태는 미술을 전공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나섰다. 그의 생각과 의지, 성격, 취향 등 모든 것을 그의 화풍에 담아냈다. 어릴 적 모험과 도전을 즐기던 활발하고 진취적인 사고가 강렬하고 매혹적인 색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풍경, 인물, 꽃, 누드 등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유연하면서도 창조적인 미적 구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추구해 왔다. 이러한 예술적 감각을 담아 한국의 정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작품은 한번 쳐다보면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작가의 무언의 이야기를 시사하고 있다.

강렬한 색감과 평면 기법으로 예술 양식 승화

대표작 중 하나인 <붉은산의 환타지>는 산을 주재로 한 작품이다. 삼각형을 기본 구도로 순도 높은 강렬한 원색이 여백의 색감과 대비되는 것이 특징이다. 최예태 화백의 터치로 산의 웅장함과 위엄을 거룩하게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2019 프랑스 마니에 시청앞 장마리자끼 초대회장과 함께

또 <붉은 누드의 환상>, <설산과 붉은 나부> 등은 살아있는 입체감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짙은 푸른색과 녹색으로 각각 채색된 단색조의 여인 <누드> 시리즈 에서는 빛과 색채의 조화로 몽환적이고 영롱한 초현실주의적 예술을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화단에서는 이러한 색을 표현해 내는 그를 향해 색채의 마법사, 색채의 거장이라고 불렀고 한국 화단의 새로운 예술 양식을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최예태 화백은 붓 뿐 만 아니라 나이프기법, 붓기, 적층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그의 강렬한 색채와 매혹적인 터치는 이러한 기법들을 통해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올해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예태 화백은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불곡산 자락의 작업실에서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예술가는 탁월한 영감의 촉진제이자 불타오르는 창작의 점화제”라며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정체성을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다”고 갈망했다. 또 “예술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말로 유효하지 않다”며 “건강이 허락하고 영감이 떠오르는 그날까지 붓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작과 그러한 작품에 대한 갈증은 끝이 없는 듯 했다.

최예태 화백은 후배들에게 “모든 일에 모험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달려가라”고 조언했다. “가보지 않은 길, 낯선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그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인생의 소중한 재산이 될 것”이라며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분명히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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