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뮤직서커스 다이애나] 음악의 어머니 헨델, 숨겨진 진실

김지연 기자 승인 2020.04.24 13:56 | 최종 수정 2020.04.24 14:02 의견 0
음악가 헬렌 동상
음악가 헨델 동상

[포스트21=칼럼니스트 다이애나] 서양 음악사에서 바로크시대(1600-1750)의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은 ‘음악의 어머니’라 일컬어지면서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음악가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험난한 위기들을 극복하며 그 위치에 올랐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찍이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그였지만, 사실 헨델은 영국 출신이 아니었다.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음악적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독일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에서 궁정악장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헨델은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영국으로 도망가서 정착한다.

그렇게 런던에 도착한 25세의 헨델은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 이를 2주만에 완성하고 이는 영국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그 오페라가 바로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로 유명한 <리날도>이다.

특히 이 아리아는 우리나라에서 1999년 4인조 록밴드 플라워의 히트곡 <눈물> 도입부에 삽입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여기까지 그의 전략은 적중하는 듯 보였으나, 이후 헨델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영국의 앤 여왕(1665-1714)이 서거하고, 하필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선제후가 영국의 왕 조지 1세(George I)로 즉위하게 된다.

자신이 배신하고 떠났던 사람이 영국의 왕이 되었으니 헨델의 괘씸죄가 매우 컸겠지만, 32살의 헨델은 왕이 물놀이 올 때를 노려 미리 악단을 대기시켰다가 관현악곡 <수상음악>을 연주하는 기지를 발휘, 다시 조지 1세의 궁정악사로서 그 명성을 회복했다.

세속적인 이야기와 춤곡이 가미된 오페라를 문화상품으로 탄생시켜 음악으로 돈을 번 최초의 음악가이자 사업가로 전성기를 누린다.

그렇게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헨델이었지만, 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일명 ‘서민 오페라’라고도 불리우는 ‘발라드 오페라’가 적수로 등장하고, 본인도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페라 사업에 위기를 맞는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파산하고, 수차례 살해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서민들의 세속적 생활과 정 반대되는 성경 내용을 극으로 담은 오라토리오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영어 오라토리오를 확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때 작곡된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2부 <할렐루야>의 코러스를 듣던 국왕 조지 2세는 감동하여 벌떡 일어났고, 그 이후로 음악회에서 기립박수의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 후 헨델의 백내장은 더 심해졌고, 결국 완전히 실명을 하였음에도 조수들의 도움으로 작품을 개정하며 음악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그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고 실천에 옮겼던 그의 끈질김과 담대함이 지금의 헨델을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패를 많이 겪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 잘 생각해보자. 그 실패는 나의 능력부족에서 기인했던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에 내가 포기해서 그런 것인가?

철학자인 니체와 가수 켈리 클락슨은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그걸 견디다가 죽지만 않으면 너는 매우 강해질거야.)”이라고 이야기했던가? 코로나발(發) 경제위기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자.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절망감을 버리면 비로소 내가 가진 재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각자의 재능을 찾아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어서 오길 희망한다. 헨델처럼 눈이 멀거나 살해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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